2016년 2월 6일 토요일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는 신비

친구는 서로 나누는 사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15]

우리는 아무 공로없이 은혜받은 빚진자 인데 무슨 말씀이신지?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주셨고 받을 자격없는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친구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분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모든 일이 구약 성경에 사람들이 조금씩 하신 부분들을 모아서 하나로 완성된 구원 사역을 행하셨다.

예를 든다면, 귀한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또한 원수를 용서하고 도리어 감싸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 까지 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는 솔로몬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셨다).

이러한 수 많은 증거들은 '예수님의 예표'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이나 구약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상 그 삶 전체는 죄악으로 얼룩진 사람들이다.

이런 죄인들의 집합인 인간의 역사에서 공의의 하나님에게 근거로 내세우실 만한 아주 작은 조각들을 모아서, 우리를 대신하시고 또한 대표하시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산 제물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드리는 구원의 사역을 통해 그 공의를 충족시키는 근거로 사용하고 계신다.

믿음의 조상들이 행한 작은 일들을 모아서 예수님이 한꺼번에 하신 것이고, 다른 면으로는 혼자서는 절대로 완벽할 수 없는 우리 개개인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신 인생을 완성하시고 제물로 드리신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이 행한 삶의 조각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펼치셔도 당연히 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겸손하신 만왕의 왕은 사람을 들어 쓰셨다.  그것도 불완전한 사람들을 그 분의 완전하신 방법으로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29]

우리들은 늘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인지 혹은 우리 인간이 다 하는 것인지로 많이 생각하고 주장한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아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오랫동안 논쟁하는 것처럼 ...

우리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시고 또 그 일은 우리가 다 하는 것" 이다.

"우리가 다 하는 것"이라는 부분은 우리가 스스로 말하기에는 너무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 앞에서 무릎이 꿇어지는 것이다. 그 분의 십자가를 깨닫는 자에게는.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요한 계시록 4:10]

"화목제"라는 말의 신비를 생각해본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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