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22일 수요일

마귀가 사람 마음에 생각을 넣는 방법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에게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지금껏 해오던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행위, 즉 인간 스스로 만든 종교나 개인적인 수행, 과학 혹은 철학적인 방법론을 통한 영원에 대한 접근, 개인적인 신념으로 이상적으로 살아보려는 노력 등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돌아보게 하신다.

도리어 이런 행위들 자체가 더욱 죄에 대한 매혹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겉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더욱 죄를 갈망하는 나락에 빠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자신의 삶에 진실한 사람이라면 결국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혹 그럴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때 겸손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줄것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지금껏 해오던 자신의 노력을 멈추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던 철학자 니체가 그랬고, 노인과 바다와 같은 인간 본연의 존재를 근접하게 묘사했던 헤밍웨이나 톨스토이같은 천재들이 그렇다. 니체, 헤밍웨이, 톨스토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광인이 되어 삶을 마감한다.

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하나님, 즉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지금껏 십자가를 부정하고 살아왔던 인생이지만 정말 힘든 경우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에게 직접 오셨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복음을 전하러 간 사람에게 자신의 주먹을 흔들며 과거에 조직 폭력배였다는 걸 과시하고 또 현재도 많은 돈과 3번의 결혼, 그리고 아주 나이차이가 많은 여자와 사는 걸 자랑했던 60대 초의 어떤 분을 만난 적이있다. 그 분은 아이러니하게 3일후 스트로크(풍을 맞음)를 당해 머리를 가르는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중환자실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다시 찾아갔을 때 겨우 움직이는 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다고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서도 기도를 따라하는 그를 보며 고생을 통해 인생을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도 그 사람처럼 십자가에 못이 박혀 꼼짝달싹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신다. 어떤 의미에서는우리에게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고통을 요구할 수도 있을거라고 아주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는 2살 이후로 부모님없이 이모와 외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났다. 수십년간 매일같이 누적된 그 상실감은 30이 넘어 예수님을 영접할 때까지 나의 존재자체를 위협하는 것(허무감과 불쑥 죽고 싶은 마음)이었으며 반대로 삶의 의지를 불붙게 하는 연료를 분출하는 못된 펌프와도 같았다.

실로 성령님의 임재하심으로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던 나의 생모를 용서하게 되는 그 기적은 나의 삶에 큰 전환점이었다. 그 용서는 다름아닌 예수님의 나를 위한 죽음을 깨닫게 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인생의 장식(Decoration)을 위해 읽기 시작한 성경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인치심과 증거하심으로 복음이 나의 뢰마로 들어오게 되는 거듭남이 있게 된것이다.

그후 많은 크고 작은 기적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모든 것들이 회복되는 기적이었다. 그 중 한가지는 생모를 만나게 되고 새로 결혼한 분(그분은 현재 목사님)과 그의 아들, 즉 씨다른 형제조차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비슷한 경우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현재의 내 모습과 그 일(예수님을 내 마음으로영접하는) 이전의 변화의 정도를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이후 긴 시간이 흘러 나는 과거의 상처를 바탕으로, 아직도 부끄럽지만, 우릴 위해 피흘리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이름없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용서와 그로인한 회복은 오랜기간 나에게 능력의 발판이 되고 있었는데, 최근에 깜짝 놀란일이 나에게 있었다.

성경에 마귀가 사람 마음에 나쁜 것을 넣는다고 기록된 부분이 여럿된다. 유다 마음에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넣은 것부터 심지어 예수님 제자들까지 밀까부르듯 한다. 솔직히 이런 구절의 참 의미를 몰랐었다.

한번은 모친이 새로 낳은 형제 - 그 녀석은 착하다 - 를 바라보다가 모친이 너무 감싸고 돈다는 생각이 들더니 갑자기 수십년전 예수님 만나기 전의 내 마음에 있던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피로 씻어진 것인데 그 흔적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는 것, 마귀가 원하는 것이며 노린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나를 많이 도와주는 아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장면이나 그런 느낌(현실과는 다른)을 꿈으로 꾸게도 한다. 예를 들어 나의 말을 너무 들어주지 않고 혹은 나를 멸시하는 것과 같은것, 그러면 분명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대화를 나누는 우리 부부임에도 나는 수준낮은 것들이 갑자기 잘 보이고 또 끄집어 내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무의식 세계의 발현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런 것들이 마귀의 조작이라는 것을 안다.

실제로 큰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날의 어떤 기분(마귀가 넣어 주는 마음)에 따라 행동한다.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늘 감싸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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