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11일 화요일

죄에 대한 통찰력있는 글

인터넷에서 발견한 죄에 대한 통찰력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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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ut of 4>

안녕하세요? 이렇게 신앙 진단 코너를 통해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가볍게 여기며, 심지어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지만 또 가장 읽혀지지 않는 책이 된 것처럼... 어쨌든 이렇게 여러분들과 신앙에 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필자는 오랫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기보다 막연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의 막연함은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졌듯이, 말씀만이 우리 마음과 신앙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데 말씀을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저를 주님이 말씀을 통한 믿음 앞으로 이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저는 여러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며, 얼마나 열심이 있으며,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분명하게 말씀을 통해 신앙 생활을 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말씀이 없는 신앙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비슷하게 알고 있던 하와처럼, 말씀을 어설프게 알고 있어서는 더욱 안됩니다. 비슷한 말씀은 사단이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네 부분, 즉 죄와 율법과 심판과 믿음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죄야 뭐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일 죄를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죄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6∼8)

위의 말씀을 보면, "네 악"과 "네 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는 악"과 "우리가 보는 의"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죄와 선은 철저히 무시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죄와 선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먼저 바로 잡혀야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시각(視覺)의 조율(調律)입니다. 즉, 시각의 차이를 없애는 일인 것입니다.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욥 10:4)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삼상 16:7)

위의 말씀들은 명백하게 우리가 보는 시각과 하나님이 보는 시각이 다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각의 차이를 없애는 일보다 자기 시각으로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곧 '하나님과 마음을 조율하는 일'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낫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으니라."(롬 10:2,3)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신앙이 얼마나 예수님을 대적했는지는 잘 알고 계시지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2)

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고 귀히 여기셨던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마음과 합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려고 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며, 그것을 하나님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

위의 말씀을 보면, 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선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악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춰 선과 악을 보지 않고 사람들의 얼굴이나, 자기 기준을 따라 보기 때문에 선과 악에 대해 많은 오류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창 3:22∼24)

명심하십시오.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잃어버린 것은 그들 속에 하나님과 다른 선악의 기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기준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 보기에 신앙 생활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을 알지 못하면 그 신앙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 신앙의 진단과 확신이란 코너가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을 얻어 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해줄지는 잘 모르지만 마음을 열고 대하신다면 틀림없이 귀한 복을 얻으시리라 믿습니다. 혹시 글을 대하시면서 의문이 있거나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또는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꼭 집회에 참석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푸는 하나님의 종들과의 개인 상담이 당신을 깊고 분명한 믿음의 세계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2 out of 4>

이제 구체적으로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다시 묻지만 여러분들은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감기가 걸리면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는데, 이때 콧물, 기침은 감기가 아니고 감기의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과 죄의 증상은 다릅니다.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남을 미워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은 죄의 증상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런 증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사람은 죄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도 죄가 있지만 증상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문둥병을 죄로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자기도 모르고 3년, 자기만 알고 3년, 남도 알고 3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의 몸에 문둥병 증상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문둥병 환자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그는 문둥병 환자였는데, 그것이 이제야 밖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드러나기 전에도 그는 이미 문둥병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여러분이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간음하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죄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에 매여 있습니다.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둑질하도록 나를 끌어가는 그 성품이 문제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때 느껴지는 야릇한 쾌감, 남의 험담을 들을 때의 흥미진진한 마음, 사촌이 땅을 살 때 배아픈 마음, 이런 마음들이 여러분 속에는 없습니까? 있다면 죄의 병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눈썹이 빠지고 손가락이 빠지고, 장티푸스에 걸리면 열이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듯이, 죄의 병에 걸린 사람은 남을 미워하게 되고 살인하게 되고 간음하게 되고 도둑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병은 고치지 않고 열만 내리게 한다고 됩니까? 문둥병 환자가 손가락 떨어지는 것을 떨어지지 않게 붕대로 감는다고 됩니까? 병을 고쳐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여러분이 도둑질을 했고 거짓말을 했고 살인을 했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고 ‘범죄’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은,“내가 도둑질했습니다.” 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

한 번 물어봅시다. 간첩이 자수하면 내 동포, 내 형제가 되지요? 여러분 아시지요? 간첩이 자수하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생활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간첩인데 자수를 하러 갔습니다. 어떻게 자수를 합니까? 경찰서에 가서
“경찰관님, 저는 철도를 폭파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요인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군사 기밀을 탐지하려고 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간첩죄를 자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간첩인 결과로 하게 되는 일이므로, 자수하려면 “나는 간첩입니다.” 하는 자백을 먼저 해서 간첩죄에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간첩일 때 지은 모든 죄는 자동으로 용서되지요. “나는 간첩입니다. 지령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하고 자수해야 하듯이, 우리가 주님 앞에 자백하는 것도 죄의 결과인 범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근본적으로 죄덩어리로 뭉쳐진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자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다윗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부하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다윗은 그 죄 때문에 너무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뭐라고 고백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제가 어느 날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보니, 어떤 여자가 있는데, 너무 예 뻐 보여서, 제가 미쳤지, 정신도 없이 데리고 와서 잤는데, 그만 그 여자가 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엉엉.”
다윗이 그렇게 고백했습니까? 시편 51편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죄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과 죄의 근본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당신은 운전할 줄 압니까?” 하고 묻는다면,
“예, 나는 깜박이를 잘 켜지 못하는데요. 시동도 잘 못 걸고, 차선을 잘 못 바꿉니다. 회전을 잘 하지 못하는데요. 고속도로 주행을 잘 못합니다. 이상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동차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는 운전 못합니다.”
라고 말하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건 다 잘 하는데 깜박이 켜는 것만 못할 때에는 “나는 깜박이 켜는 것을 잘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브레이크를 잘 못 밟아요.” 한다면 그 말은 다른 것은 다 잘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죄는 안 짓고 거짓말 한 가지 죄만 지었다면 “나는 거짓말 했습니다.” 하면 맞습니다. 또, 여러분이 다른 죄는 다 안 짓고 깨끗한데, 남을 미워하는 죄 한 가지만 지었으면 “나는 남을 미워했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맞습니다. 이해 가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죄악투성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죄의 나무이며 죄의 자식이고 죄의 씨여서 아무리 스스로 깨끗하게 하려고 해도,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안됩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건성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노력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지만, 진실로 주님을 섬기려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사람은 해 보다가 도저히 안되면 “나는 이제 못하겠습니다.” 하고 주저앉는데, 그 상태가 바로 요한1서 1장 9절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잉태한 인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죄인인 그 부분에서 해방을 받으면 모든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됩니다. 여러분, 자수한 간첩의 간첩죄를 용서할 때 “너, 간첩 죄는 용서하지만 군사기밀을 누설한 죄는 용서 못해!” 그렇게 합니까? “간첩죄는 용서하지만 요인을 암살하려고 했던 것은 용서 못해.” 그렇게 합니까? 간첩죄가 용서될 때 거기에 부속된 모든 죄는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그러니까 요한1 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는 내가 지은 범죄나 죄의 결과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므로 해도 안 되니까, 주님 당신이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그 모든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해서 덮어놓고 회개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노트에다 죄를 적어서 불태워 버립니다. 모닥불에 죄목록을 기록한 종이를 태우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66권 중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약하기 때문에 죄를 사해 준다고 하면 귀가 솔깃해집니다. 이 시대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죄를 씻는 문제로 교인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옛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죄를 씻기 원하는 교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서, 면죄부를 사면 죄가 씻어진다고 성도들을 우롱한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성도들이 정확하게 죄를 사함받는 방법을 모르고 덮어놓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열심만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교회를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죄 씻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지는지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그냥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씻어지겠지.’가 아닙니다. 확실하게 죄가 씻어져야 합니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이렇게 죄를 사함 받는 날이 여러분에게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 날이 없으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늘 어두운 죄의 그림자가 막혀 있어서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 해 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있어서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죄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죄를 못 이긴다고 고백했을 때 주님이 도와주지, 내가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은 주님이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죄에게 져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지고 지는 자가 이긴다는 것,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는 것,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 기도를 하지만,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는 못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은 죄를 질 사람이 아닌데 죄를 지어서 부끄러워하며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은 근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만이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out of 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가 있는 죄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으로는 인정을 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모든 인간이 선이 없는 악으로만 가득찬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제 자신도 처음에는 내 자신이 전부 악하다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죄를 지었고, 내 속에 추하고 악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시인했지만 내 자신이 전부 악뿐이고, 선(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6장 5절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보셨을 때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계획은 악하고 어떤 계획은 선하며, 또 어떤 때는 악하지만 어떤 때는 선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고 의롭거나 거룩한 것이 손끝만큼도 없이 모두가 악하다는 말인데 이것을 오랫동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생각은 모두 악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 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

하나님은 인생을 굽어 살피사 선을 행하는 자가 있는가 살펴보셨습니다. 인간들의 생각에는 착한 자도 많고 선을 행하는 자도 많은 것 같았으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대가 흘러가면서 오고간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선한 자를 찾아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사도 바울은 선이 없는 대신 '원함은 있노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사람의 속에 선이 없으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마음은 실제 있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죠. 오히려 원한다는 것은 아직 얻지 못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내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대통령이 아니며, 또한 대통령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행하는 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선이 없는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외식, 곧 위선이라고 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시장에 가 보면 가짜 금반지 하나에 천원도 하고, 사파이어 반지 하나에 팔백원,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에 천 오백원도 하는데, 반지를 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진짜 반지를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가짜 반지를 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은 속에 선한 것이 없는데, 선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가짜 선을 가지고 선인 줄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반지와 도금한 반지의 차이점은 진짜 반지는 아무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도 금이지만, 가짜 반지는 겉은 진짜 같으나 속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때때로 행하는 선(善)들은 어떤 면으로 보면 선(善)같이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속속들이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은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며 기뻐할지 모르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된 선이 아닌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예수님은 나무의 속성을 통해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죄인 즉 죄의 나무라면 죄의 열매만 맺히는 것이지, 선의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사 1:4)

위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행악의 종자입니다. 씨 자체가 악의 씨이기 때문에 나무도 열매도 모두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구태여 이런 것을 따져서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고 악한 것뿐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선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선을 키워서 선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아니므로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없습니다. 즉,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노력이 가치가 있겠지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복숭아를 맺을 수 없고, 포도나무가 아무리 노력해도 무화과를 맺을 수 없다는 진리를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그치고 "하나님, 나는 선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악뿐입니다" 하며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나아오지만, 자기 속에 선이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므로 자기 행위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

예수님은 이 땅위에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선한 사람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일을 물은 것은 자신에게 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같이 자신에게 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하려고 하지 선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행하기 보다 선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사야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갈 것이라."(사 45:24)

즉, 하나님에게만 의와 선이 있기 때문에 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석유가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는 나라에 가서 수입해야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행위를 의존하므로, 자기 행위를 보고 주님 앞에 나가서 가책을 느끼다가는 또 기뻐하곤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만, 주님은 자기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자기 속에 선이 전혀 없으며,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뿐인 것을 깨닫고 나아오는 사람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주시고 의로움을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해서 의롭게 되고, 그의 거룩함을 얻어서 성도(聖徒)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의 상태, 즉 스스로 전혀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에게서 의를 얻은 적이 있습니까?

<4 out of 4>

저는 얼마 전에 변속장치가 자동인 차를 탄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차를 운전하는 동안, 무의식중에 자꾸 왼쪽 발이 클러치 페달을 밟으려고 움직이고, 오른손은 기어를 바꾸려고 변속기어 손잡이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자동 변속장치이기 때문에 클러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그렇게 했습니다. 오랫동안 수동 변속장치에 길들어져 있는 운전 습관이, 자동 변속장치 차를 운전하는 중에도 무의식중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떤 생각이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의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수많은 허물과 죄를 범하며 사는 자신의 모습을 인해 ‘인간은 죄인이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고정 관념으로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거룩하게 되었다.’라고 하면, ‘세상에서 늘 죄를 짓고 살고, 또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의인이고 거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하며 의아해 합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는 길을 두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율법을 통한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는 길입니다. 율법을 통한 길에는 ‘완전한 행위’가 요구되고, 은혜로 되는 길에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 하면 ‘거짓말도 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나쁜 마음조차 전혀 품지 않는 행위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의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행해서 의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다른 길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는데,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입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행위를 따라 의인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또,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든 죄를 씻음받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고 했는데, 실제 노아의 모습을 보면 허물과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또, 죄악으로 가득찬 소돔 성에 거하며 허물과 실수가 많았던 롯에 대해서도, 성경은 ‘의인’(벧후 2:8)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역시, 롯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인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의(義)는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행위에 의해서 변하거나 깨어질 수 없는 영원하고도 온전한 의(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말씀과 ‘의인은 행위적으로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고정 관념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義)를 자신의 행위와 결부시키게 만듭니다. 능히 우리를 의롭고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도, 행위가 온전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어를 변속해야 할 필요가 없는 자동 변속장치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수동 기어 자동차를 운전한 습관 때문에 클러치 쪽으로 발이 움직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완전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의 의와는 전혀 다른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길을 따라 천국에 오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도 죄인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자, 아담은 그 음성을 듣고 숨어 버렸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은 네 마음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의 위치,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 앞에 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그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믿음이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옷을 벗었기 때문입니까? 이들은 지금 벗은 상태가 아니라 무화과나뭇잎을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벗은 상태였지만, 참 자유로웠습니다. 그 때는 벗었어도 자유로웠는데, 이제는 입었어도 자유롭지 못하고,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아담의 마음에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아담은 자유가 없는 위치에, 죄를 가진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느 위치에 머물러 있습니까?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까? 사랑의 아들의 나라는 정죄함이 없으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며, 확신 가운데 거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 보면,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예수 안으로 옮겨지면 확신은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은 죄에 대해서 자유가 있고, 두려움이 없는 곳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신앙이 헌금을 하거나,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등 하나님을 향하여 뭔가를 할 때는 괜찮지만, 죄를 범하거나 마음에 어두움이 생기면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 하나라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상태라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담이 왜 숨었습니까? 왜 두려워하고 자기를 가리우려 합니까?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꾸밀 필요도 없고 가릴 필요도 없이 떳떳이 나갔는데, 죄가 들어온 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해도 여러분의 마음에 자유가 없고, 선으로 도덕으로 끊임없이 가리고 덮고 또 가리고 … 그렇게 나가도 떳떳하지가 않습니다. 내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죄가 있는 아담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운 마음과 부자연스러운 가운데 있으면서 자신을 잘난 사람처럼, 선한 사람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까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혹,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이 아볼로와 같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내가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기도를 잘 하느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먼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지길 바라실 뿐입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기 전의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두려운 위치에 있습니까? 숨는 위치에 있습니까? 자기를 가리고 꾸미는 위치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죄를 가리워야 하는 자리에서,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지지 않았다면,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뭔가를 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다면 진정 죄에서 자유한 의인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지금 죄인의 위치와 의인의 위치 중 어느 위치에 서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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