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3일 토요일

내가 구원받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누가복음 14:10]

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어떤 분과 함께 기도하는 도중에 주님이 주신것이다. 
전도자로 지난 세월동안에 이런 종류의 "자기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고 그 중에 언제나 올무에 걸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 위해 괴로워하던 나에게는 참으로 귀한 깨달음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전도자 분들께 귀하게 나눠지기를 소망한다.

오랜 기간 교회를 다니고 스스로의 의를 믿음이라 믿고 계신 분이 계셨다.  그 분의 부인에게 먼저 주님이 찾아오셨고 그 분은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처럼 가족들간에 전파되었다.   물론 그 가족들도 교회는 오래동안 다니고 있던 터였다.

그 남편분은 대단한 의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두려워 먼저 말을 붙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맞을것이다.

그런 그 분이 부인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보고는 찔림을 받고 자기가 "토기장이가 친히 그 뜻으로 만드신 천히 쓸 그릇" [누가복음 9장] 혹은 다른 말로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자가 아닌가라는 참으로 원천적이고 놀라운 질문을 하기에 이른다.

늦은 밤 다음날 새벽에 한국 귀국을 앞두고 기도하러 간 그 자리는 언제나 그렇듯 처음 와본 낮선 자리처럼 나를 느끼게 했다.  조용히 그 분의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 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했다. 

나는 모두 손잡고 돌아가면서 기도하는 걸 좋아한다.  "손을 얻은 즉 나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육체의 병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그래서 손을 얻은 즉 낫게 되며 가끔씩 귀신들린자는 손을 스치거나 잡는 것만 가지고 엄청나게 싫은 반응을 보이며 도망가게 된다.

그 날도 함께 한 동역자와 그 권사님 부부와 모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첫 마디는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는 바램으로 기도했다.  "주님 이 분이 만일 구원받은 자라면 자기가 구원받았는가라는 이 겸손한 기도를 통해 더 깊은 곳으로 데려 가시고, 만일 구원받지 못했다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두 번째 마디에서 뜻하지도 않던 주님의 말씀이 입에 들어왔다.  "말씀에 기록하신 대로 말석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청하신 주님이 오셔서 높은 자리로 올려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의 말씀을 기도를 통해 그 분께 말씀하셨고 그것은 또한 나의 오랜 고민 (아마도 진지한 전도자라면 누구나 가진)도 해결해 주셨다.

실제로 진리의 영 성령님을 모신 자라면 누구나 가짜와 진짜를 분별하는 능력이 생긴다.  아마 대번에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이 능력은 많은 경우 미성숙한 전도자에게 현실적으로는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것은 성령님이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그 사람의 구원에 도무지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카톨릭의 교황이나 큰 교회의 목사님과 같은 직분이나 교회다닌 햇수와도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주님이 주신 영분별의 은사가 전도자에게 큰 괴로움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할 것인가 말것인가?  또한 주님 주신 영분별의 은사는 너무 깨끗한 것이지만 분명 나의 육적인 것이 중간에 끼여 어느 정도는 틀릴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놓고 수년간 기도한 적이 있다.  사람을 보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구분할 능력을 나에게 주십시오 라고 ... 복음을 전해야할 나로서는 전할 대상을 알게 해달라는 정당한 기도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흐른 후 실상은 그것이 하나님 머리위에 올라 앉으려 하는 나의 교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 당장은 도저히 쳐다보기 조차 싫은 자라고 할 지라도 주님이 내일 변화시켜 구원하실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그 하나님 계획보다 더 알려고 하는 것 아닌가?  마치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고는 박넝쿨 밑에 앉아서 못된 고집을 부리며 니느웨가 망하기를 내심 바라는 요나의 교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 후 사람의 구원여부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고, 그리고 될 수 있다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 혹 교회안의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될수 있으면 적게 하며 다녔었다.

잘못하면 내가 내 의와 판단으로 "당신은 구원받았다" 혹은 "구원받지 못했다"라는 말을 해버리는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

그러나 그 날 주님이 주신 말씀은 그 무서운 교만의 올무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셨다.  구원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말씀처럼 올라앉으라는 확신을 "직접" 주실것이기 때문이다. 

  ... 쉽게 풀어보자면

청함을 받았을 때에
...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보았고 교회에 몸을 담고 있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 마음에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했다고(말석) 생각하고 구하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 그렇게 겸손히 구하고 있으면 너를 청한 자, 곧 예수님이 오셔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 너를 부르시고 죄인되었던 우리를 십자가로 친구삼으셔서 구원의 마음을 주시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으로 인해 구원이 있으리라

너무나 간단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많은 부분 나의 인간적인 교만이 주님의 간단한 진리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그것을 언제나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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