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0일 일요일
2010년 9월 16일 목요일
가위눌림
(1) 저는 현재 42살입니다. 30세까지 거의 매일 밤 가위에 눌렸습니다. 시작은 국민학교때부터 한 것 같습니다. 어릴때 우리 집은 귀신단지 (작은 상자에 향같은 것 꼽아놓고 죽은 사람 이름 써놓은 것)를 모셨습니다. 우리 먹을 것은 없어도 귀신 앞에 매일 밥을 떠다놓곤 했었지요. 우리 외할머니는 중풍으로 알아누우셨는데 소원이 그 귀신 단지를 없애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나와서 아픈 사람을 계속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2) 우리 식구중 어느 누구도 무서워서 그 단지를 감히 없앨수는 없었습니다. 저와 우리 이모, 그리고 대부분의 가족들이 밤마다 가위에 눌렸습니다. 저는 밤새 눌릴 때도 있었고 숨을 못쉬어 허덕이면서 이러다가 죽는 것이구나 생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수십년 지속되었습니다.
(3) 놀라운 건, 나중에 고향을 떠나온 후, 이모와 우연히 이야기 하던중 그 가위에 눌릴 때 나오던 귀신의 모양이 이모와 저가 본것이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양은 통상적인 상상속의 귀신 모양이 아닌, 아주 새빨갛고 표면이 매끄러운 자르지 않은 단무지 모양의 두개의 물체였습니다. 저와 이모는 수십년 후에도 이 특이한 모양의 귀신의 형태가 일치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4) 30세 되던 해에 그냥 놀러 다니던 교회에서 사람들의 이중성 때문에 교회를 떠나려고 하던중, 성경을 혼자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사람이 만들어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며 믿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정말로 계셨습니다.
(5) 울면서 나같은 것때문에 이 우주를 먼지처럼 여기시는 크신 하나님(=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 바로 나 때문에 ... 이 사실을 성령을 통해 마음으로 깨닫게 된후 (그전에도 교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감당못해 몇 달간 회개하며 울기만 했습니다. 하나님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
(6) 놀라운 건, 그 이후 그렇게 수십년간 나를 괴롭히던 가위눌림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한지 12년이나 지난 지금껏 단 한번도 가위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예수님)이 나를 잡고 있던 마귀를 완전히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저에게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그 이후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믿을 때 동일한 현상이 일어남을 보았습니다.
(7) 중요한 건, 죄인임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것은 전혀 해당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요 라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계십니다.
저의 이메일은 mkim.help@gmail.com입니다. 지금 괴로움을 당하시는 분은 이메일 주시면 함께 기도합시다. 무당이나 집에 그런 분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럴수 있습니다. 저도 대한민국 웬만한 절에는 제 이름이 기와장 밑에 세겨져 있습니다. 잘되게 해달라고 우리 모친이 옛날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절대로 해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걸고 맹세코 여러분을 더러운 흑암이 이기지 못합니다. 함께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87417
http://tinyurl.com/759c3r7
(6) 놀라운 건, 그 이후 그렇게 수십년간 나를 괴롭히던 가위눌림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한지 12년이나 지난 지금껏 단 한번도 가위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예수님)이 나를 잡고 있던 마귀를 완전히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저에게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그 이후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믿을 때 동일한 현상이 일어남을 보았습니다.
(7) 중요한 건, 죄인임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것은 전혀 해당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요 라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계십니다.
저의 이메일은 mkim.help@gmail.com입니다. 지금 괴로움을 당하시는 분은 이메일 주시면 함께 기도합시다. 무당이나 집에 그런 분이 있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럴수 있습니다. 저도 대한민국 웬만한 절에는 제 이름이 기와장 밑에 세겨져 있습니다. 잘되게 해달라고 우리 모친이 옛날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을 절대로 해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걸고 맹세코 여러분을 더러운 흑암이 이기지 못합니다. 함께 기도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087417
http://tinyurl.com/759c3r7
2009년 12월 14일 월요일
그 추운 겨울날 마굿간 말밥통으로 오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예수님)에 대한 참다운 찬양이 들어있는 노래입니다.
영원히 간직해야할 주님과의 첫사랑이 들어있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여러분도 이 찬양을 들으시며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작은 QT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 그 옛날 마굿간에 오신 하나님은 바로 날 생각하고 계셨음을 그래서 그 분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구세주임을 고백해보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gwe7GDl9-04
구원을 기다리는 소망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죄악은 공의를 요구한다네
그것은 우리가 갚을수 없는 것으로 갚으라고 하네
하나님이 자비를 나타내사 그의 크신 사랑을 드러내셨다네
우리힘으로 하늘에 다다들수 없을 때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왔다네
그는 마굿간으로 태어나셨고 그것은 십자가로 향한 길이었다네
약속된 메시야 – 하나님의 시간이 시작될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그의 사랑이 어떤 댓가를 치뤄야할 지 아셨지만
그는 마굿간으로 오셨다네
십자가에 오르시기 위해
Longing for a Savior
A hopeless world would wait
Sin demanded justice
At a price we could not pay;
But God displayed his mercy
The greatest gift of love
When we could not reach heaven
Heaven came to us.
Chorus:
He made a way in a manger
A way to the cross
Messiah the promised
Before time had begun;
For God so loved this world
Though he knew what love would cost
He made a way in a manger
To make a way to the cross.
In Bethlehem a stable
Became a throne of grace
As God himself our Savior
Drew near to take our place;
His mother smiled in wonder
As shepherds stood in awe
The sacrifice of heaven
Lay sleeping in the straw.
Bridge:
He is the life that died our death
The precious Lord Jesus
Laid down his sweet head.
그는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Chorus:
He made a way in a manger
A way through the sun
Messiah, the promised
Before time had begun;
For God so loved this world
Though He knew what love would cost
He made a way in a manger
To make a way to the cross.
Away in a manger, no crib for his bed
The little Lord Jesus laid down his sweet head
The stars in the sky looked down where He lay
The little Lord Jesus, asleep on the hay.
2009년 11월 11일 수요일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 ????????????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나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만큼의 죄인이고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예수님을 닮겠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저 예수님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세상 박수받는 자리에서 내려와서
이 글은 릭 조이너(Rick Joyner) 목사님이 쓴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The Final Quest)"이라는 책에서 발췌(p.241-252)한 것이다. 목사님은 기도중 입신의 경험을 하게 되며, 그 때 하늘나라에서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다. 왕노릇하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게 한다.
릭 조이너 목사님이 영적인 경험을 통해 전해 들은 그 이야기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며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자리를 구하지 않고 예수님과 그가 전하신 복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은 멈추어 섰고, 나는 우리 옆의 보좌들 위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아직도 가장 높은 왕들이 앉아 있는 곳에 있었다. 그 때 나는 바로 옆의 한 남자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인가 알고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지 기억을 할 수 없는데요.”
“당신은 환상속에서 나를 보셨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 당신은 실제 인물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아직 젊은 그리스도인으로 내 삶의 어떤 문제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을기억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아파트 근처의 공원 한가운데 나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주님께서 내게응답해 주실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 상태였다. 내가 앉아서 성경을 읽는 동안 나는 환상에 빠졌었는데, 그것은 내 생애의 첫번째 환상이었다.
그 환상속에서 나는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가르치고, 아픈 자들을 방문하여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일에 대단히 열심이었고 사람들에 대한 순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영락없이 방랑자이거나 집 없는 사람이었다.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잘못하여 그가 가는 길로들어가자, 그것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발로 고양이를 바깥으로 매우 거칠게 밀어내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내게 이들 두 사람중 누가 더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지를 질문하셨다.
“첫 번째 사람이지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다. 두 번째 사람이다.”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시고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첫번째 사람은 대대로 주님을 믿어온 아주 훌륭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아주 부흥하는 교회 내에서 양육되었고 가장 훌륭한 성경 학교들 중 한 곳에 다녔다. 그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백이 주어졌으나, 그는 오직 일흔 다섯만 사용하고 있었다.
두번째 사람은 귀머거리로 태어났다. 그는 학대받았고 어둡고 추운 골방에 갇혀 지내다가 여덟 살때 당국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옮겨졌으나 가는 데마다 계속학대를 받았다. 결국 그는 길거리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그에게 그 분의 사랑 셋을 주셨으나, 그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격노와 싸운 끝에 그 새끼 고양이를 해치지 않도록 억제하였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이 솔로몬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휘황찬란한 보좌위에 왕으로 앉아있는 것을바라보았다. 수 많은 천사들의 무리가 그의 분부를 기다리며 그의 주변에 정렬하고 있었다. 나는놀라서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하물며 이 위대한 왕들 중에 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주님, 그의 마지막 이야기도 해 주십시오.” 내가 간청했다.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것이다. 안젤로는 내가 그에게 준 적은 것에 너무나 충성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사랑 셋을 더 주었다. 그는 그것을 모두 사용하여 도둑질을 그만두었다. 그는 거의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는 빈 병을 모으고, 가끔씩 잡일을 시키는 사람들을 찾아가 생기는 돈으로 먹을 것을 샀다. 그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글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복음 전도지 한 장을 보냈었다. 그가 그것을 읽었을 때성령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는 자기 생애를 나에게 전부 바쳤다. 나는 다시 그에게 나의 사랑의 갑절을 더 주었고 그 후 그는 그 모든 것을 충성되게 사용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비록 그러한 빈곤속에 있었으나 그가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전도지에 사용하여 길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몇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까?” 나는 그가 왕들과 함께 앉아 있으려면 엄청난 숫자일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질문했다.
“한 사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그를 격려해 주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한 사람을 내게로 인도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어, 다른 한 영혼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길 모퉁이에 몇년이라도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 전체가 나에게 그를 이곳에 데려올 것을 간청하고 있었고나도 그가 자신의 보상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왕이 되기 위하여 그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내가 질문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충성하였다. 그는 나와 닮게 될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결국 순교자로 죽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극복하였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순교자가 되었습니까?”
“그는 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겼다. 그토록 적은 것으로 그렇게 많이 이겼던 사람은 너무 적었다.나의 백성중 많은 사람이 한 세기전만 해도 그 편리함 때문에 왕들도 부러워했을 만한 편한 집에살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반면, 안젤로는 추운 밤 종이 상자 하나를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것을내가 임재하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그는 사과 한 개를 가지고도 내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성대한 향찬에 대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했다. 그는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에 충성하였다. 그것이 비록 내가 너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는 네가 그의 앞을 여러 번 지나다녔기 때문에 환상에서 너에게 그를 보여주었다. 너는 한번은 네 친구 한 사람에게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그에대해 말한 적도 있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버스 정류장에서 도망 나온 엘리야의 무리중 또 다른 한 사람이 있군요.’ 너는 그가 사람들을 복음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원수가 보낸 ‘광신도’라고 말했다.”
이 체험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 중 가장 혹독한 파격이었다. 나는 충격 이상을 받았다. 나는경악했다. 나는 그 특정한 상황을 기억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았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와같은 단순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행색이 남루한 노방 전도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큰 동정을 갖지 못해 왔었다. 내게는 그들이 사람들을 복음에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 특별히파견된 것처럼 보였었다.
“죄송합니다. 주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너는 다시 용서받았다.” 그 분이 즉시 응답하셨다. “그리고 네 말도 옳은 것이다. 잘못되고 심지어는 비뚤어진 동기를 가지고 길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신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비록 훈련을 받지못하고 무식하다 할지라도 너는 외모로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안젤로와 같이 보이는 나의 참 종들이, 내 이름을 위하여 사람들이 세운 큰 교회와기관들 안의 세련된 전문직들 중에 있는 만큼 많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안젤로를 쳐다보라는 몸짓을 하셨다. 내가 몸을 돌리자 그가 그의 보좌 앞의계단을 내려와서 바로 내 앞에 섰다. 그가 양팔을 크게 벌려 나를 껴안았고 아버지처럼 내 이마에입을 맞추었다. 사랑이 나의 전신에 쏟아 부어지면서 내 온몸을 통해 흘러 내려와, 나의 온 신경계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사랑이었다.
“그는 세상에서도 너희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는 내 백성에게 줄 것이 많았으나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나의 선지자들조차도 그를 기피했다. 그는 성경책과 두 어권의 책을 사서 읽고 또 읽으면서 믿음을 키웠다. 그는 교회에 가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를 받아 주는 교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교회가 그를 맞아들였다면 그들은 나를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는 바로 내가 교회를 향해 문을 두드리는 노크, 그 자체였다.
나는 애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가 순교자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어쩐지 나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반은 예견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그는 추위 속에 의식을 잃었던 한 늙은 술주정뱅이를 살리려다가 동사하였다.”
내가 안젤로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간증을 세속화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순교자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님, 저는 그가 진정으로 승리자인 것을 압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 온 것은 공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들도 순교자로 간주됩니까?”
“안젤로에게는 그가 살아왔던 매일 매일이 하나의 순교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겨우 생존할정도만 유지하였고 그의 생명을 필요로 한 친구를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였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들에게 썼던 대로, 네가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네가 사랑으로 네 자신을 주게 될때, 그것은 많은 것이다. 안젤로는 매일 죽었다. 그는그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성도중 가장 작은 자로 여겼으나, 실상 그는 가장 큰 자중 하나였다. 네가 이미 배운데로, 스스로를 가장 큰 자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안젤로는 한 교리나 그의 증언을 위해서도 죽지 않았으나,나를 위하여 죽었다.”
“주님, 제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돌아가서도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을 잊지않도록 해 주십시오.” 내가 간청했다.
릭 조이너 목사님이 영적인 경험을 통해 전해 들은 그 이야기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며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자리를 구하지 않고 예수님과 그가 전하신 복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은 멈추어 섰고, 나는 우리 옆의 보좌들 위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아직도 가장 높은 왕들이 앉아 있는 곳에 있었다. 그 때 나는 바로 옆의 한 남자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인가 알고 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인지 기억을 할 수 없는데요.”
“당신은 환상속에서 나를 보셨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아니 당신은 실제 인물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자 나는 내가 아직 젊은 그리스도인으로 내 삶의 어떤 문제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을기억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아파트 근처의 공원 한가운데 나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주님께서 내게응답해 주실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 상태였다. 내가 앉아서 성경을 읽는 동안 나는 환상에 빠졌었는데, 그것은 내 생애의 첫번째 환상이었다.
그 환상속에서 나는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쉬지 않고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가르치고, 아픈 자들을 방문하여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주님일에 대단히 열심이었고 사람들에 대한 순전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는영락없이 방랑자이거나 집 없는 사람이었다. 작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잘못하여 그가 가는 길로들어가자, 그것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발로 고양이를 바깥으로 매우 거칠게 밀어내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내게 이들 두 사람중 누가 더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지를 질문하셨다.
“첫 번째 사람이지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다. 두 번째 사람이다.”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시고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첫번째 사람은 대대로 주님을 믿어온 아주 훌륭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아주 부흥하는 교회 내에서 양육되었고 가장 훌륭한 성경 학교들 중 한 곳에 다녔다. 그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백이 주어졌으나, 그는 오직 일흔 다섯만 사용하고 있었다.
두번째 사람은 귀머거리로 태어났다. 그는 학대받았고 어둡고 추운 골방에 갇혀 지내다가 여덟 살때 당국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기관에서 저 기관으로 옮겨졌으나 가는 데마다 계속학대를 받았다. 결국 그는 길거리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그에게 그 분의 사랑 셋을 주셨으나, 그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동원하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격노와 싸운 끝에 그 새끼 고양이를 해치지 않도록 억제하였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이 솔로몬도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휘황찬란한 보좌위에 왕으로 앉아있는 것을바라보았다. 수 많은 천사들의 무리가 그의 분부를 기다리며 그의 주변에 정렬하고 있었다. 나는놀라서 주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그가 실제 인물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고, 하물며 이 위대한 왕들 중에 있다는 것은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주님, 그의 마지막 이야기도 해 주십시오.” 내가 간청했다.
“물론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것이다. 안젤로는 내가 그에게 준 적은 것에 너무나 충성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사랑 셋을 더 주었다. 그는 그것을 모두 사용하여 도둑질을 그만두었다. 그는 거의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는 빈 병을 모으고, 가끔씩 잡일을 시키는 사람들을 찾아가 생기는 돈으로 먹을 것을 샀다. 그는 들을 수는 없었지만 글 읽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복음 전도지 한 장을 보냈었다. 그가 그것을 읽었을 때성령이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고 그는 자기 생애를 나에게 전부 바쳤다. 나는 다시 그에게 나의 사랑의 갑절을 더 주었고 그 후 그는 그 모든 것을 충성되게 사용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비록 그러한 빈곤속에 있었으나 그가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전도지에 사용하여 길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몇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까?” 나는 그가 왕들과 함께 앉아 있으려면 엄청난 숫자일것이라 생각하며 이렇게 질문했다.
“한 사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그를 격려해 주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한 사람을 내게로 인도하였다. 그것이 그에게 큰 힘이 되어, 다른 한 영혼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길 모퉁이에 몇년이라도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 전체가 나에게 그를 이곳에 데려올 것을 간청하고 있었고나도 그가 자신의 보상을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왕이 되기 위하여 그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내가 질문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충성하였다. 그는 나와 닮게 될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결국 순교자로 죽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극복하였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순교자가 되었습니까?”
“그는 나의 사랑으로 세상을 이겼다. 그토록 적은 것으로 그렇게 많이 이겼던 사람은 너무 적었다.나의 백성중 많은 사람이 한 세기전만 해도 그 편리함 때문에 왕들도 부러워했을 만한 편한 집에살면서도 감사하지 않는 반면, 안젤로는 추운 밤 종이 상자 하나를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것을내가 임재하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그는 사과 한 개를 가지고도 내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성대한 향찬에 대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했다. 그는 내가 그에게 준 모든 것에 충성하였다. 그것이 비록 내가 너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일지라도, 나는 네가 그의 앞을 여러 번 지나다녔기 때문에 환상에서 너에게 그를 보여주었다. 너는 한번은 네 친구 한 사람에게 그를 손가락질하면서 그에대해 말한 적도 있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버스 정류장에서 도망 나온 엘리야의 무리중 또 다른 한 사람이 있군요.’ 너는 그가 사람들을 복음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원수가 보낸 ‘광신도’라고 말했다.”
이 체험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 중 가장 혹독한 파격이었다. 나는 충격 이상을 받았다. 나는경악했다. 나는 그 특정한 상황을 기억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았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와같은 단순한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행색이 남루한 노방 전도자들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큰 동정을 갖지 못해 왔었다. 내게는 그들이 사람들을 복음에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 특별히파견된 것처럼 보였었다.
“죄송합니다. 주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너는 다시 용서받았다.” 그 분이 즉시 응답하셨다. “그리고 네 말도 옳은 것이다. 잘못되고 심지어는 비뚤어진 동기를 가지고 길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신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비록 훈련을 받지못하고 무식하다 할지라도 너는 외모로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 안젤로와 같이 보이는 나의 참 종들이, 내 이름을 위하여 사람들이 세운 큰 교회와기관들 안의 세련된 전문직들 중에 있는 만큼 많이 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안젤로를 쳐다보라는 몸짓을 하셨다. 내가 몸을 돌리자 그가 그의 보좌 앞의계단을 내려와서 바로 내 앞에 섰다. 그가 양팔을 크게 벌려 나를 껴안았고 아버지처럼 내 이마에입을 맞추었다. 사랑이 나의 전신에 쏟아 부어지면서 내 온몸을 통해 흘러 내려와, 나의 온 신경계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사랑이었다.
“그는 세상에서도 너희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그는 내 백성에게 줄 것이 많았으나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나의 선지자들조차도 그를 기피했다. 그는 성경책과 두 어권의 책을 사서 읽고 또 읽으면서 믿음을 키웠다. 그는 교회에 가려고 시도하였으나 그를 받아 주는 교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만일 교회가 그를 맞아들였다면 그들은 나를 영접하였을 것이다. 그는 바로 내가 교회를 향해 문을 두드리는 노크, 그 자체였다.
나는 애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배우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가 순교자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고서, 어쩐지 나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반은 예견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그는 추위 속에 의식을 잃었던 한 늙은 술주정뱅이를 살리려다가 동사하였다.”
내가 안젤로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간증을 세속화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순교자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님, 저는 그가 진정으로 승리자인 것을 압니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그가 여기에 온 것은 공정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들도 순교자로 간주됩니까?”
“안젤로에게는 그가 살아왔던 매일 매일이 하나의 순교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겨우 생존할정도만 유지하였고 그의 생명을 필요로 한 친구를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였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들에게 썼던 대로, 네가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네가 사랑으로 네 자신을 주게 될때, 그것은 많은 것이다. 안젤로는 매일 죽었다. 그는그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성도중 가장 작은 자로 여겼으나, 실상 그는 가장 큰 자중 하나였다. 네가 이미 배운데로, 스스로를 가장 큰 자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자로 여김을 받는 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안젤로는 한 교리나 그의 증언을 위해서도 죽지 않았으나,나를 위하여 죽었다.”
“주님, 제가 이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돌아가서도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을 잊지않도록 해 주십시오.” 내가 간청했다.
2009년 6월 23일 화요일
의롭게 산다는 것은 ...
의롭게 산다는 것은 내가 제대로 산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나의 영은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나의 춤추는 혀는 그 춤을 절대 멈추지 않고, 나의 영리한 머리는 결코 그 계산을 멈추지 않으며, 나의 위장은 남의 입에 들어가는 것조차 빼내오라는 주문을 서슴치 않으며, 나의 음란한 심장은 극한까지 가는 것을 결코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의 커다란 대못이 박힐때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손수 새옷을 입혀주실 바로 그때까지도 못이 박힌채 꿈틀거릴 것이며 나를 괴롭게 할것입니다.
이런 나를 ...
이런 부끄러운 나를, 마치 예수님이 속옷까지 벗기우시고 사람들앞에 달리신 것처럼, 하나님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내려놓고, 나를 용서해주시려고 대신 못박히신 그 이름(예수님)을 부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롭게 사는 방법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누가복음 18:13-14)
2009년 6월 22일 월요일
당신이 왜 죄인입니까?
가끔씩 TV에 멀쩡한 젊은이들이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나 살인을 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잡혀서 고개숙이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자를 보면 내 마음에 즉시 올라오는 생각이 있다. 저 놈은 착한 사람들을 위해 죽어야겠다. 아마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꾸로 당신이 죽어야할 죄인이라고 한다. 딱히 눈에 뜨일만한 죄를 지은것도 아니고 TV에 나오는 나쁜 사람과 비교하면 너무 착한 사람인데 ...
기독교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쒸우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런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끼리 더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패한 방법으로, 사람을 착하게 만들수 없는 종교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신비하다고 할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심어놓고 퍼뜨린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착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TV에 나온 강도는 그 부모가 암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수술비 몇 만불이 당장 필요할 수 있잖아요? 우리가 그 사정을 모릅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리 일해서 저금을 해놓으면 되지 않는가? 그렇지만 그 자는 직업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저와 많이 친했던 친구는 중학교 2학년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집안의 농사를 도와야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와 담임선생님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저는 저를 키워준 아버지와 별로 가깝지 않았습니다. 평생 이야기 나눈 시간을 다 합해도 몇 시간이 안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시골에서 대학교를 간다할 때 서울대학교를 못갈거면 대학교 가지말고 저의 고향에 있었던 제철공장에 취직하라고 하시며 용접일자리를 실제로 찾으러 다녔습니다.
결과적으로 서울에 있는 그래도 괜찮은 학교에 합격했습니다. 저는 이것만해도 대단한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입학금 한번만 대주시면 나머지는 내가 벌겠다고 사정을 해서 학교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별것 아닌 것이지만 저는 이것이 큰 상처였지만, 중학교도 졸업시켜 주지 않는 내 친구 아버지에 비하면 나를 키워준 아버지는 그야말로 천사였습니다.
이야기가 딴 길로 빠졌지만 TV의 그 강도는 중학교도 못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은 세상 - 유학갔다 와도 취직이 안되는 - 에서 수백군데 원서를 제출해도 될수가 없겠지요.
그러면 노가다라도 해보면 되지 않나? 이렇게 물을 수도 있지요. 노가다를 직접 해보셨습니까? 우리처럼 책상물림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듭니다.
몇 년전 저의 인도인 매니저 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대단히 스트레스 받는 회의중이었는데 마치 무당의 신음소리와도 같은 혹은 새소리와도 비슷한 휘이~ 이런 소리를 지르더니 책상에 쓰려졌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놀랐고 911을 불렀는데 그 사람은 Seizure라는 병, 즉 한국
말로 간질 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입에서 거품이 나오더군요. 하이타이 풀어놓은 것처럼 그런식은 아니었습니다.
몇년간 일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그런 병이 있는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철저히 숨겼겠지요.
TV의 강도가 그런병이 있다면 아마 노가다는 못할 것입니다. 몇년에 한번이라해도 그 순간 위험한 옥상이라면 죽게될 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언제가 제가 많은 노력을 해서 현재의 내 자리에 와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이큐가 최소 100이상은 되기 때문에 공부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어떤 분을 가르치다가 깨달았습니다.
대단한 세종대왕 덕분에 바보라도 30분이면 한글을 깨우친다고 생각했는데 그 분은 몇 달을 가르쳐도 한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머리가 그래도 평균이상으로 태어나서 감사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는 태어나고 나니까 간질같은 병이 없었기에 노가다라도 하지 이런 교만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비교적 좋은 부모밑에서 또한 잘사는 한국같은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내가 만약 아프리카에 태어났다면 아니면 밥도 먹기 힘들던 한국의 보리고개 시절에 태어났으면 내가 대학교를 갈 수 없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부모님이 암병에 안걸려 수술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자식들이 멀쩡한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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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자는 간음한자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은 음욕을 품었다가 지우고, 꿋꿋하게 이겨내는 나의 의지는 상관하지 않으시고 간음, 혹은 강간한자와 같다고 하십니다.
왜 멀쩡한 사람을 강간범취급합니까? 아니 취급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아주 간단한 우스운 가정을 해봅시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떨어져서 사람이 없는 무인도에 미스코리아와 함께 가게 됐다고 해봅시다. 나는 어떻게 할까요? 좀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동네에서 칭찬받는 가정적인 남편입니다. 그런 제가 과연 얼마나 오래 가족들을 생각하며 제대로 있을까 싶습니다. 한 달 정도? 길게 잡아 육개월정도 지나면 아마 살림차리고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강제로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살림차린 나와, 그렇지 않은 칭찬받는 나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는 재수없어(?)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차이말고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강간범이 한 10년형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루에도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수십번씩 받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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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경건한(?) 종교생활로의 기독교를 믿다가 늙어진 후에 성령님을 체험하고 거듭난 어떤 장로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자기 자신을 항아리에 받아놓은 흙탕물이라 했습니다.
가만히 어려운 일없이 나두면 흙이 다 바닥에 가라앉아서 마치 정말 깨끗한 물처럼 보이는데, 한 순간 누군가 손을 넣어 휘젖거나 항아리를 흔들기라도 하면 그대로 흙탕물이 되는 그것이 자기라고 고백하는 말을 듣고는 참 맞는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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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호주머니에 돈 몇푼이 있으므로 빵을 훔치지 않는 것이지, 혹은 은행에 통장에 몇 만불이라도 있으니, 아니면 내일이라도 회사에서 월급받으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도둑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십니다.
"의인은 없으되 하나도 없고"
하나님은 내가 지은 범죄를 가지고 벌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나타난 현상을 보고 정죄하게 부추깁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상황만 되면 언제든지 튀어나오는 그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벌하십니다. 많이 튀어나오느냐 적게 나오느냐는 당신의 능력보다는 당신에게 주어진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이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 죄의 본성을 위해 대신 벌받으시고는 너희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발버둥 처봤자 소용없는 시커먼 죄악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것을 눈물로 진심으로 고백하는 자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있는 자를 죄없다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 스스로는 어쩔수 없는 그 시커먼 죄악을 대신 갚아주시려고 이 세상에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계급장을 다 떼고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맞아 죽어야 할 그 자리, 십자가에 나 대신 당신대신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옛것은 다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살아날 방법입니다. 어디서 성경 한권을 구해서 읽고 가만히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처지를 다 아신답니다. 나는 이걸 몰랐다가 나이 30이 넘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http://tinyurl.com/7eypt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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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3일 월요일
관 뚜껑은 바로 지옥문
제목을 정확하게 붙였습니다. 제가 쓸 내용과 일치합니다. 원치 않으시면 아직도 안보실 선택을 할 시간은 있습니다.
한 번은 공동묘지에 서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좀 길게 자랐지만 관리가 잘 된 잔디가 깔려있었고 묘지 비석이 여러개 흩어져 있었습니다. 비가 왔었는지 이슬들을 보았고 담은 부드러운 검은 창살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 자신 상당히 차분한 느낌을 가졌었고 마치 잘 관리된 정원을 산책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곳을 거닐 던 중에 파헤쳐져 아직 덮어지지 않은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조금의 장식이 되어있는 서양식 관이 깨끗하게 놓여져 있었고 주위에는 흙더미가 관을 덮기 위해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다가가서 그 관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는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계단이 아래로 놓여 있었습니다. 마치 관으로 가장 해놓은 비밀의 장소같았고 제가 옛날에 즐겨보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열려지는 또다른 공간을 통하는 입구같았습니다. 그 계단은 조금은 캄캄했지만 긴 계단이 아니고 한 몇십단정도 밖에 되지 않는 흔한 구조의 2단으로 꺽여져 있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 계단을 내려갔더니 작은 개천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고 한 5미터도 채 안되는 작은 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제가 받았던 느낌은 이 작은 공간밑에 이런 큰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리를 넘으려고 했는데 몇몇 사람이 또 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지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이 다리이전에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고 ... 제 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 말을 들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너무 당연히 들을줄 알았습니다. 안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제가 그분들께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그 분들이 알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진짜인지 분별해보려는 작은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 지하의 공간은 아주 특이해서 천장은 아주 낮고 그 넓이는 마치 제가 지나온 캔사스 벌판과도 같이 너무 넓었으며 빛은 없었습니다. 다리위에 걸린 몇개의 등이외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도 정확히 볼수는 없었지만 아주 몇 십마일 밖정도의 멀리에서 마주 번개가 치듯 불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촛불의 흔들림같이 어른거렸습니다. 저에게는 어린거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곳은 이 멀리까지 보일정도의 큰 불이라는 생각을 하고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라도 빨리 달아나야 겠다는 생각에 계단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석처럼 나를 전방위로 당기는 어떤 힘때문에 한계단 한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 당기는 존재에게 나는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을 사력을 다해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계단을 올라와 관뚜껑을 뒤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올라온 지상에는 그 무서웠던 바로 몇 미터 밑의 세상은 전혀 아랑곳없이 다시 고요한 묘지였습니다. 길지만 잘 정돈된 잔디였고 풀잎에 맺힌 이슬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바로 밑에 그런 광대한 장소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
지금껏 사람들께 많은 비난들을 들어왔지만 저는 저에게 주어진 진실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꿈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옥이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않고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가 강호순이가 지은 죄보다 더 큽니다. 강호순이도 하나님을 정말로 알았다면 그럴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소속된 분중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은 만나기를 애쓰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강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전도에 대한 몇가지 깨달음
마태복음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내가 평생 묵상해야 할 말씀, 내가 어떻게 전도할 처지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라)
마태복음 4: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전도는 이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케 하기 위해 물(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는 회개의 권면과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 이후 예수님의 영이 그에게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너희들은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하셨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이 직분을 정확히 감당했다. 내가 성령받는 것을 인도하거나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예수님이 나의 연약함을 생각하시면 간혹 보여주실수도 있으리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내가 평생 묵상해야 할 말씀, 내가 어떻게 전도할 처지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라)
마태복음 4: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전도는 이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회개케 하기 위해 물(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라는 회개의 권면과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 이후 예수님의 영이 그에게 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너희들은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하셨고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이 직분을 정확히 감당했다. 내가 성령받는 것을 인도하거나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예수님이 나의 연약함을 생각하시면 간혹 보여주실수도 있으리라.)
2009년 1월 27일 화요일
예수를 믿는다는 것 [퍼온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하여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서로 잘 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설교로 듣거나 신학으로 배워서 아는 지식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오해하거나 착각합니다.
특히 현대신학과 다원주의 신학에 빠진
신학자들, 목사, 신학생들, 교인들이 착각합니다.
예수를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다원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됩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편)
에 나온 주장들이 치우치고 잘못된 것임을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 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나의 전존재로 체감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생각만 해도 가슴에 눈물이 흥건히 고이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심판의 비밀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의미가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천국과 지옥의 의미 역시 관념적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하나님까지 피상입니다.
그들에게는 머리와 입술로만 고백하는 "유사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의 결박에서 사실적으로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과 은사로 증거하시므로
하나님이 아시고, 나도 알고, 사람들도 알게 됩니다.
자신의 고귀한 존재 가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가 직접 받아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형언 할 수 없는 큰 감격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 영혼 깊은 곳에서는 회개와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안다는 의미는 객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 1대1로, 주관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잘 알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마치 친엄마가 그 자식을 알고 자식도 친엄마를 알듯
서로가 실제적으로 잘 알고, 서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죄란
피상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철학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란...
그저 머리 속에 맴도는 개념이자 신학적 담론일 뿐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 신학과 신앙이란 단지
자기 취향에 맞추어 예수를 재구성해나가는 행위일 뿐입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들에게 주님은
모호한 역사적 예수가 될 뿐이지만
죄 사함을 받은 자, 구원 받은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동행하시며
역사하시며 주관하시는.. 한 인격이십니다.
그에게는 예수가 그의 생명이자 모든 것이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예수는
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종교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죄 사함을 받고, 다시 태어난 자들에게 예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예수와 자신 사이에..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누구도, 그 무엇이라도)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회심했다는 것이며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며,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옛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며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와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 자신이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인문학으로 무장한 신학,
지식에 천착하는 현학적인 담론,
종교를 넘나드는 배포와 관용을 과시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매료(魅了)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종교인들의 논리나 말장난에 속지 않으십니다.
위의 글은 아래의 웹싸이트에서 퍼온것입니다.
2008년 9월 28일 일요일
구약의 예수님
-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창 40:1)
술맡은 관원장은 오직 포도나무만 바라본다. 그 나무의 싹과 꽃과 열매와 그리고 그 즙을 바친다. 물론 그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요 그 즙은 흘리신 피를 나타낸다. 예수님의 피로만이 사람이 구원됨을 보여준다.
반면에 떡굽는 관원장은 흰 떡 세 광주리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다. 그 자는 자기의 죄 때문에 달린다.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은 무엇일까? 바로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 왜 놋뱀인가?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많은 능력을 보여주시며 출애굽 시키신다. 이것은 마귀(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 욕심을 따라살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홍해바다를 가르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 자체가 사실 기적이 아닌가?
이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을 다시 그리워한다. 놀랍게도 ... 그리고 부추, 파, 마늘과도 같은 식물을 그리워한다. 또 하나님이 주신 것, 만나나 메추라기 반석의 생수들을 불평한다. 이 때 불뱀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뱀을 놋으로 만들어 매달라고 했을까? 이것은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받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인데 마음에 걸리는 것은 왜 거룩한 모습이 아닌 사람을 괴롭히는 뱀의 모양으로 만들어 달으라는 것인가?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아래 있는자(신 21:23)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은 분명 맞는데 왜 뱀의 모양인가?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할렐루야 ... 그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기꺼이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008년 9월 14일 일요일
우리는 대나무 죽순처럼 태어나지 않았다
가끔씩 대단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때로는 죽음을 뛰어넘는 그런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위대함을 볼때도 있다. 이것도 역시 죽음을 뛰어넘는 경우를 본다.
물론 시간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한것이다. 죽고 못사는 남녀들도 결혼하고 몇십년 지난후 계속 그 사랑의 수준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모의 사랑도 비슷하다. 나이먹어 부모와 자식간의 이해관계의 주도권이 바뀐다면 분명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 가끔씩은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감히 의문을 가져보건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비슷한 것인가? 혹은 끓어오르는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성경 아가서 의 말씀들은 과연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가슴이나 목덜미와 같은 여성의 신체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에로스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해 놓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을 근거로 주일설교하시는 목사님을 나는 본적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닌가?
만약에 우리가 대나무 죽순처럼 땅에서 그냥 솟아나서 태어난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방법으로 태어나도록 만드셨다고 가정하면 부모 자식간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남녀성이 갈라지지 않고 중성으로 스스로 남녀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남녀간의 사랑이란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육체적인 분리와 그에 바탕한 정신적인 공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가지 사랑 모두 육체적인 창조원리에서 그 근본이 생겨났다고 볼수 있다.
나는 감히 남녀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자식 사랑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같은 진실하고 죽음을 이길수 있는 대단한 성분이 포함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정직하게 생각하면 그렇다.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중성들만 살아가는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을 알 수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실감할수 있을까? 혹은 우리가 대나무 죽순처럼 땅에서 쑥 올라와서 자라나는 식으로 태어났다면 도무지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을 어떻게 1%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맛배기를 남녀사이와 부모 자식간의 사랑속에 복사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신실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인간사이에도 죽음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
어떤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갖다붙인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데로 충분히 하실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이 만약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하얀 종이에 사람을 어떻게 만드실지 디자인하고 계신 다면 자기의 사랑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반드시 새겨넣으시지 않겠는가? 또 그것이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아래는 에베소서의 말씀이다. 사랑하는 가정을 가진 자라면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말씀이지만 마지막 23절을 읽어보라. 이 말씀은 결코 남녀간의 사랑과 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크신 선물인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사용해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우리(교회)에 대한 사랑과 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22-32)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는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 같은 것을 안했으면 한다. 아버지들에게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귀한 교육 프로그램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우리의 영원한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십자가 아래에서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은 것같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때문에 모인 자들중에 헷갈려 하는 자들이 있을 까봐 걱정이 된다.
천주교와 구원
수 많은 영적인 용사들이 천주교를 통해 나왔고, 또한 그들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 자들이 많음을 안다. 하지만 현재의 천주교회는 명백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단이다.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의 선언으로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고 선언된다. 구원이 다른 종교에도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참람한 말이며 오히려 지엽적이라고 볼수 있는 마리아 숭배나 성당안의 각종우상, 그리고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들보다 훨씬 정면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씩 천주교 신자들을 전도하다가 느낀것은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래의 성경말씀에서 천주교내에 분명 존재하는 예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오히려, 세상적으로 너무나 커져버린 그 이단의 세력을 비판하지 못하는 하니님의 참된 복음을 소유한 자들을 나무라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된 자와 아닌 자를 정확히 구분하신다.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하시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며 새로운 관계라고 볼때 그것을 부정하는 천주교 공회의 선언은 참으로 "사단의 깊은 비밀"이라 볼수 있겠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천주교에서 실제로 행하는 많은 행위들을 칭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하나님 말씀을 엉뚱한 곳에 갖다 붙여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런 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책망하는 진실하지 못한 자들이 많다. 내가 못하더라도 선한 행위하는 자들은 인정해야 하고, 또한 타 종교에서 행해지는 선한 행위도 엄연한 선한 행위이다. 그것은 자체로 분명히 그 가치를 칭찬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고집부리면 거짓된 기독교 신자라고 여겨져서 전도가 안된다. 왜? 남의 선한 행위가 선하지 않다는 거짓말을 하니까. 한가지 분명히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은 그 선한 행위로 사람이 구원받지 않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참된 전도자라면 남의 선한 행위를 칭찬하고 인정하지만 아무리 행위가 선해도 하나님을 떠난 원죄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믿는 복음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 일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중에 제일은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전도이외에 다른 여러가지 행위를 함으로 전도에 대한 책임을 피해보려한다. 그것은 99%를 놓치고 1%를 붙잡는 것과 같다.
말씀에 기록된 음란한 죄는 영적인 음란을 의미한다. 성경 호세아 서를 읽어보라. 사람의 음란에 빗대어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다.
18. “두아디라 교회 지도자에게 이렇게 써서 보내어라. ‘불꽃같이 빛나는 눈과 빛나는 청동 같은 발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시는 말씀이다.
19. 나는 네 행위를 알고 있다. 또한 너의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에 관해서도, 그리고 처음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
20. 그러나 한 가지 책망할 일은, 스스로 예언자라고 칭하는 여자 이세벨을 그대로 두고 보고만 있는 일이다. 그 여자는 내 백성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잘못 인도하고 있으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죄를 짓도록 부추기고 있지 않느냐?
21. 내가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는 뉘우치지 않았다.
22. 그러므로 내가 그녀를 고통중에 내던져 신음하게 하고, 똑같이 음란한 죄를 짓는 자들에게도 그러한 고통을 줄 것이다. 만약 지금 바로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으면, 즉시 이 일을 행할 것이다.
23. 그 여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죽게 하여, 내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의 깊은 곳까지 살피는 자임을 온 교회가 알도록 할 것이다. 나는 너희가 행한 대로 갚을 것이다.
24.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 안에 그녀의 가르침을 좇지 않고 사탄의 깊은 비밀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다른 짐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25. 내가 갈 때까지 지금 가고 있는 길을 꾸준히 걸어가거라.
26. 마지막까지 내 뜻대로 행하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줄 것이다.
27. 쇠막대기로 그들을 벌하여 너희 앞에 복종케 하여 질그릇같이 그들을 깨뜨릴 것이다.
28.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와 똑같은 권세이다. 또한 새벽 별도 네게 주겠다.
29.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라.’”
요한 계시록 (2:18 - 29)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예수님의 모습
한번은 전도하다가 퇴짜를 맞고 낙심해서 예수님에게 불공평하다는 불만같은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베드로와는 수년을 함께 지내셨고 바울에게도 직접 그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들과 같이 직접 예수님을 대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만나니 너무 불공평합니다 ...
그런 유치한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 생생히 보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 꿈속에서 뛸듯이 기뻐했다. 그 십자가는 마치 카메라의 줌인과도 같이 나에게 더 가까운 예수님의 모습, 그 중에서 그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마치 붉은 색 페인트 깡통을 머리에 뒤집어 쓴것과 흡사했다. 피가 너무 흘러 겨우 눈을 뜨고 계셨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기뻐하던 나는 울었다. 예수님 이런 식으로 나를 구원하셨군요.
그런데 꿈에서 십자가를 처음보고 왜 뛸듯이 기뻐했는 줄 아는가? 놀랍게도 이런 생각때문이었다. "이제 나도 드디어 히트치는 구나! 사람들 모아놓고 간증도 하고 자랑도 하고 그래야지!" 이것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조차도 ...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이렇게 하는 걸까?
나중에 깨달았지만 나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였다. 그런 날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날 대신 십자가에 올라가시고 눈을 뜨지 못할 지경까지 피를 흘리신 것이다. 이런 나를 위해 말이다.
2008년 8월 22일 금요일
교회부흥의 확실한 방법
저에게는 다음의 세가지가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고 묵상한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경영학적 이론을 교회에 도입하려고 하시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왜 그럴까도 생각해 봅니다. 저도 어떻게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을까 혹은 돈을 벌수 있나에 대해 생각해 볼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경영학적 방법론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대상으로, 또 이윤추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교회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 계획이 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일을 제쳐놓고 전도한다.
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자신의 능력의 한계가 주어져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도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사람도 그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먼지와도 같아서 긍휼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 시편 103: 10-14
* 참고로 위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구약"성경에서 그처럼 많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고 그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우리의 체질)임을 아시고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지는 지옥 갈 운명(단지 먼지뿐)을 아시고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멀리 옯기셨으며(예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의롭다(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아니하셨으니)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는 해야할 일의 종류가 무수히 많습니다. 각각의 일들이 모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각각이 그 중요한 정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꼭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타민 C는 그렇게 몇 그릇분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겨우 작은 알약하나 정도만 먹어도 충분한 것입니다.
교회의 할 일중에서도 모든 것을 다 잘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실질은 그렇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분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일을 다 잘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교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능력을 위주로 해보려는 일종의 인본주의 일것입니다.
교회부흥을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친교도 하지말고 해야합니다. 저 자신도 교회 밥먹으러 나가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친교를 하지 않아도 가슴이 천성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교회안에 많다면 저절로 되어집니다. 혹은 예배 끝나고 근처 식당에 가서 먹으면 교회 친교실처럼 바쁘지도 않고 중요한 이야기도 할 시간과 장소가 주어집니다.
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으로 대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다 잘할 만큼 여러분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으시다면 한가지만 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2. 기도는 전도하면서 생기는 진짜 기도제목을 위해 진짜로 기도한다.
가끔씩 기도를 매일 5시간씩 했다고 자랑하는 분을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문제를 놓고 굉장히 몸부림치는 것이 보여 긍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자기 자신과 씨름을 저렇게 매일 오랜 시간 하다가 하나님과 언제 함께 일하실까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불속에서 만세부르고 계신다는 생각도 강해게 들었습니다.
기도할 때 일부러 간절해 지려고 노력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경건과 같다고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문제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도를 하다보면 진짜 기도제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기도는 ~을 주십시오와 같은 종류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는 그냥은 잘 안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절함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 전체의 진실성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다 일어난 일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했던 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 제가 살던 마을에 임하게 해주시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해달라는 기도를 무릎꿇고 오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기도가 잘못되었습까? 나 자신에 대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 때 하나님은 그런 기도보다는 청년 A와 아주머니 B를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A와 B라는 사람은 그 때 제가 알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만나기가 꺼려졌던 사람이고 제 마음에 이미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들은 진실하지 못해서 전도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나름의 결론내려 놓았던 때였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살던 동네 전체가 전도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와 제가 가장 꺼려했던 그 두 사람을 전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어는 것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어느 것이 이제 처음 믿은 자가 드리는 기도로서 교만한 기도라고 보십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 때 그렇게 꺼려했던 B아주머니는 놀랍게도 지금은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근심을 모두 자신이 담당한 것처럼 늘 부정적인 말만 하던 분이, 하나님께서 터치하심으로, 그 동일한 그 분의 성격이 이제는 불신자가 어떻게 하면 피흘리신 예수님을 알게 될까 늘 근심하는 그런 곳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몇 시간씩 전화해서 어떻게 복음전해야 하는지 이럴때는 어떻게 하고 저럴때는 어떻게 하는지를 묻고는 합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하나님 나라를 구할 간절한 기도제목이 저절로 주어집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다보면 내가 복음을 얼마만큼 깨달았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또 불신자와 단 몇 분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대화끝에 획 돌아서는 자신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참으시는 것과 그 긍휼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아무리 전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 자를 보며 성경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이 집을 다섯번이나 나가 나중에는 남의 애까지 잉태한 아내를 찾으러 나가는 자와 같다고 하신 그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저절로 깨달아집니다. 내 입이 너무나 어눌하고 세상의 불신자들은 마치 텔레비젼 아나운서와 같이 논리정연하게 나에게 반박하는 것을 볼때 하나님! 나에게 이 사람의 모든 말을 뛰어 넘어 마음을 돌려세울 능력을 사무치게 원하게 됩니다. 혼자 전도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면 내가 기댈 참 전도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됨과 동시에 놀랍게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정확하게 구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시면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이 저절로 깨달아집니다. 원래는 목사님이 전도를 제일 잘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지요. 현실은 이 순서가 전도를 가장 두려워 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마치 일반인이 노래하다 틀리면 아무 실수도 안되지만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가 틀리면, 혹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큰 창피를 당하는 것 때문일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직분자들을 전도하지 못하게 묵어놓은 족쇄가 됩니다. 이러한 우리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단은 얼마나 영악한 자입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버립시다. 그것이 참된 의미의 교만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종류의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120% 응답하신 다는 것입니다. 왜 120%라고 썼냐하면 100%응답되는 것은 당연히 받게 되는 것이고 또 언제나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 여기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음을 아실 것입니다.
3. 하나님 이름으로 모여 1시간 말하면 예수님이라는 단어를 50번이상 이야기 하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주일 설교가 될 수도 있고, 성경공부가 될 수도 있고, 전도현장이 될 수 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위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신약 성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 처음부터 끝까지를 의미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 : 39)
참고: 구약성경에 수없이 기록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의 깊은 것을 깨닫는 데 아주 중요하다. 많은 분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저절로 깨닫는다. 마치 신약성경의 예수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 나도 정말 많은 부분을 이렇게 깨달았다. 시중에 잘 찾아보면 굉장히 많은 숨은 기록들이 있다. 놀라운 건 이런 책들은 전혀 베스트 셀러가 아니다. 어쨌든 내가 읽어본 책중 다음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래에 나오는 레위기(성경 ...) 설교를 봅시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지으라고 명하신 일종의 텐트, 즉 성막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성막을 처음 들어갈 때 바로 보여지는 죽임당하는 짐승 혹은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짐승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나 대신 죽으신 하나님, 즉 그 예수님말입니다. 레위기(성경...) 본문에 나온 데로 나를 위해 죽임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두멍에 손을 씻는다 즉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가는 첫 단계입니다. 다음에 떡이 나옵니다. 그 떡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의 떡만으로 살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가 떼는 떡은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이 무서운 성막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 찟어진 성막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를 말합니다. 그 찢어진 육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지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은혜는 예수님의 이름이 몇번 나오느냐와 정비례합니다. 만약 1시간을 이야기 하는데 한번도 예수님을 말하지 않거나 끝머리에 마치 장식품처럼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당신의 직분이 무엇이건 예수님의 피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람의 속성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나 혹은 부모가 수십년을 말해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강퍅한 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화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교만을 넘어서 소경이 소경을 이끌게 되는 명백한 죄악이다. 왜냐하면 두 소경이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 이름을 50번 이상 말할 수 없는 이야기라면 하나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하지 마라. 거실에서 TV보며 얼마든지 자유롭게 혹은 직장에서 부하직원을 모아놓고 얼마든지 나누어도 된다. 단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선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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